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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게 되던 날들의 고백 (서론)
- 시중에서 산 향기 탈취제가 만든 쿰쿰하고 이상한 혼합취 (본문)
- 레몬 껍질을 소주에 담그고 사흘을 기다린 주방의 소박한 실험 (본문)
- 독한 화학 향을 치우고 찾은 내 주방의 정갈하고 순한 공기 (결론)
1.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게 되던 날들의 고백
얼마 전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나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지난 주말에 먹다 남은 김치전 양념 냄새와 반쯤 남은 생선조림, 그리고 구석에 밀려 있던 장아찌 냄새가 한데 섞여 코끝을 콱 찌르더군요.
10년 동안 건강과 생활 환경 글을 쓰면서 남들에게는 청결이 어쩌니 환기가 어쩌니 떠들어 댔는데, 정작 제 집 주방은 문을 열 때마다 숨을 흡 참아야 하는 지경이었던 겁니다. 게다가 여름철이라 그런지 주방 배수구 쪽에서도 은근하게 쿰쿰한 악취가 올라와 퇴근 후 쉬어야 할 거실 공기까지 찌푸둥하게 만들었습니다. 더는 눈가리고 아웅 할 수 없어 내 손으로 직접 주방의 공기를 바꿔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 시중에서 산 향기 탈취제가 만든 쿰쿰하고 이상한 혼합취
처음에는 마트에서 흔히 파는 강력한 은나노 성분이나 은은한 자스민 향이 난다는 화학 탈취제를 사다가 냉장고 구석에 턱 하니 넣어두었습니다. 며칠은 꽃향기가 나는가 싶더군요.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자 그 강력한 자스민 향이 김치 냄새, 마늘 냄새와 이상하게 섞이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찌린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악취의 근원을 잡지 않고 강한 향으로 덮으려고만 했던 게 부끄러운 첫 번째 시행착오였습니다.

게다가 냉장고는 우리가 매일 입으로 집어넣는 식재료들이 무방비로 들어있는 공간인데, 인공적으로 합성된 휘발성 화학 향료를 밀폐된 공간에 계속 풀어놓는다는 사실이 문득 찜찜해졌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련 자료나 환경 화학 논문들을 뒤져보니, 인공 향료에 쓰이는 일부 화학 물질이 밀폐된 저온 공간에서 음식물 표면에 잔류할 수 있다는 지식을 얻고 나서는 당장 그 통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습니다.
3. 레몬 껍질을 소주에 담그고 사흘을 기다린 주방의 소박한 실험
화학 성분 없는 천연 탈취제 만들기는 생각보다 유쾌하고 간단했습니다. 마트에서 사 온 레몬 두 개를 베이킹소다로 빡빡 씻어 껍질만 얇게 벗겨냈습니다. 그리고 먹다 남은 소주 반 병을 유리병에 부은 뒤 레몬 껍질을 퐁당 담가두었지요. 레몬 껍질에 들어있는 시트러스 산 성분이 냄새 분자를 중화하고, 소주에 든 에탄올 성분이 유해균 증식을 막아준다는 원리를 내 주방 식탁 위로 끌어온 겁니다.

사흘 동안 베란다 그늘에 숙성시킨 뒤 레몬 소주액을 분무기에 담았습니다. 가장 먼저 냄새가 심하던 냉장고 선반을 싹 비우고 마른 천에 칙칙 뿌려 구석구석 닦아냈습니다. 주방 배수구 쪽에도 레몬 소주액을 듬뿍 뿌린 뒤 뜨거운 물을 가만히 부어주었지요.
처음 만든 날 의욕만 앞서서 레몬 껍질을 흰 알갱이 살점까지 통째로 갈아 넣었다가 분무기 노즐이 막혀 액체가 새어 나오는 소소한 실수를 겪기도 했습니다. 역시 껍질만 깔끔하게 우려내야 분무기도 막히지 않고 수건에 찌꺼기가 묻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 독한 화학 향을 치우고 찾은 내 주방의 정갈하고 순한 공기
레몬 소주 탈취제를 만들어 사용한 지 보름 정도가 지났습니다. 이제는 냉장고 문을 열 때 독한 인공 향이나 쿰쿰한 반찬 냄새 대신, 은은하고 산뜻한 레몬 특유의 쾌적함이 살짝 감돌다 사라집니다.
주방 배수구에서 나던 기분 나쁜 악취도 꽤 조용해졌습니다. 거창한 화학제품을 사 오지 않고도, 요리하고 남은 재료와 먹다 남은 술 한 잔으로 내 삶의 공간을 정갈하게 가꿀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참 넉넉하게 만듭니다. 오늘 저녁 냉장고 안에 남은 레몬 조각이 있다면 버리지 말고 소주 한 모금에 슬그머니 재워두는 것부터 시작해 보아도 좋겠습니다.
